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Bf 109 (문단 편집) === 개발사 === 1933년 말,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은 새로운 단좌 단엽 전투기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독일의 4개 항공사가 각기 새로운 전투기 디자인에 착수했는데, 아라도(Arado), 하인켈(Heinkel), 포케불프(Focke-Wulf), 바이에른 항공사(BFW, Bayerische Flugzeugwerke)가 그들이었다. 독일 공군이 이들 항공사에 요청한 전투기의 요건은 다음과 같았다. || 1. 한 개의 엔진을 탑재한 완전 금속제 단좌 단엽전투기이며, 기관총 2정(각기 1000 발 장전) 혹은 20 mm 기관포(200발 장전) 1정을 장착해야 한다. 1. 6000m 고도에서 400 kph 속력을 낼수 있어야 하며, 적어도 1시간 반 이상 비행 가능해야 한다. 또한, 한계고도는 10,000m 이상이어야 한다. 1. 최고속력으로 20분 이상 비행가능해야 하며, 조종석 시야가 좋아야 한다.[* 초기형의 경우, 장갑판이 적게 배치되어 있어 의외로 시야각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G형부터는 시야각이 매우 갑갑하게 변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후기형은 에를라 하우베(Erla Haube)라는 이름을 가진 새 모양으로 콕핏 프레임을 바꾸었다.][* 109에 탑재되는 엔진들은 보통 연합군 기체들과 달리 V자형이 아니라 역V자형으로 장착되어 있다. 이렇게 V-형 엔진의 피스톤을 배치하면 당연히 시야가 좋아진다.] 1. 가장 중요한 것은 속력, 다음은 상승력, 마지막으로 기동성 순으로 우선순위를 둔다. ||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경쟁에 뛰어든 4개의 항공사 중 최종 생산권을 따내게 되는 바이에른 항공사(BFW: 후에 메서슈미트에게 인수되어 메서슈미트사로 이름을 변경)는 군용 항공기 설계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후발 주자였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아라도, 하인켈, 포케불프사는 지금껏 적어도 한번 이상씩은 군용기를 만들어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1930년 메서슈미트사는 M22라는 쌍발 야간 전투기 겸 정찰기를 디자인한 적은 있었으나, 원형기가 시험비행 도중 추락하는 바람에 생산이 백지화된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메서슈미트 항공사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경쟁처럼 보이지만, 사실 메서슈미트사는 민간용이기는 해도 전금속제 항공기 제작의 경험이 있었고, 여기에 빌리 메서슈미트의 뛰어난 항공기 제작 감각을 감안했을 때, 다소 불리함을 안기는 했지만 절망적일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다.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메서슈미트사는 최종적으로 독일 공군의 단좌 단엽전투기 생산권을 따내게 된다. 사실 전간기 동안 수많은 경주용 비행기들이 만들어졌고, 이 설계들이 기반이 되어 2차 세계대전기 전투기들의 원형이 되기에 도리어 복엽 전투기 만들던 센스보다 경주용 단엽기 만들던 센스가 도움이 되는 건 당연지사. 다른 경쟁사들이 속속 원형기들을 내놓으면서 바이에른 항공사도 Bf 109의 원형기를 만들어냈다. Bf 109는 밀폐형 콕핏을 채택했고, 조종석의 창이 오른쪽으로 젖혀져 열릴 수 있게 설계되었으며, 비상탈출시 조종석 후방 유리가 떨어져 나가게 고안되었다. 날개는 완전 금속제로 만들어졌는데, [[플랩]]과 [[에일러론]], 방향타는 금속틀 위에 캔버스 천을 덮어 끝마무리를 했다. 플랩은 조종석 좌측에 있는 레버에 의해 작동되도록 설계되었고, 약 40도까지 동작했다. 또 수평 꼬리날개의 양측에는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지지대를 마련했는데, 이 동체 디자인은 E형까지 유지되었다. Bf 109는 동체를 최대한 간소하게 구성하여 크기가 작고 가벼웠다.[* 이 특징은 독일의 또다른 주력전투기인 Fw190과도 일맥상통한다. 최대한 경박단소한 동체에 강력한 엔진을 달아 고성능을 노리는 것이다. 다만 이 작은 동체 크기는 전쟁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극한의 개량이 가해지는 조건에서 그 확장성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Fw190은 현명한 설계로 인해 지상공격용으로도 전용되는 등 109보다 훨씬 다용도로 쓰이게 된다. ~~그니까 109가 너무 한 길만 판 거다~~] [[랜딩 기어]]는 주익이 동체에 부착되는 곳에 장착해, 착륙시 날개에 가해지는 외력을 줄였으며, 경쟁사들이 설계한 주익 장착용 랜딩기어에 비교하면 주익에 별다른 장치가 필요없었고, 이동시 주익을 떼어내고 동체만 트럭에 연결할 수 있어 야전에서 운용하기에도 좋은 편이었다. 단, 랜딩기어 사이의 간격이 좁아 착륙이 다소 까다롭다는 단점이 생겨났다.[* 좁은 랜딩기어 폭에 의한 단점은 Bf 109의 영원한 라이벌인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또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은 Bf 109가 극초기형에 비해 2-3배 이상 강한 엔진을 달게 되자 더욱 심해지게 된다. F형이 A~E형에 비해 거의 모든 부분에서 다른 항공기였음에도, 이 부분은 전혀 달라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f109V1_3Seiten_neu.jpg|width=100%]]}}}|| || '''시제기 Bf 109V1의 삼면도''' || 원형기에는 엔진 카울링 상당에 MG 17 기관총 2정과 프로펠러 축에 20mm MG C.30L 기관포 1정을 장착했다. 엔진은 BMW 116 엔진을 계획했지만, 여의치 않아 유모 210 엔진을 탑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생산에 문제가 생겨 최초의 원형기 V1기에는 롤스 로이스[* 영국의 롤스 로이스가 맞는다. 이때만 해도 영국과 독일은 전쟁 상황은 아니었다.] 케스트렐(Rolls-Royce Kestrel II) 엔진을 탑재했다. 그리고 1935년 5월 28일 대망의 초도비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시험비행장으로 옮겨진 후, 많은 검열관들 앞에서 비행에 들어간 Bf 109 V1기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착륙 도중 랜딩기어가 문제를 일으켜, 한개의 바퀴로 동체착륙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 비행성능에 반해버린 검열관들에게 이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못했고, 기체 디자인 문제가 아닌 조종사 실수로 인정되어 메서슈미트사의 시험 비행조종사가 해고당하는 선에서 그치며 Bf 109는 큰 점수를 따냈다. V1기에 이어 두번째로 만들어진 V2기는 예정대로 유모 210 엔진을 탑재하게 되었다. 1936년 2월 말 경쟁에 참가했던 4개의 항공사 중 아라도와 포케불프는 기체 디자인 문제로 중도에 탈락하게 되었고, 남은 것은 하인켈사의 [[He 112]]와 메서슈미트사의 Bf 109 뿐이었다. 몇명의 엄선된 독일 베테랑 조종사들이 두 기종을 시험비행했는데 이 중에는 1차대전 독일 격추 2위의 에이스였던 [[에른스트 우데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시험비행 직후 거의 모두 Bf 109의 손을 들어주었다. 시험비행에는 여러가지 곡예비행 같은 비행술이 선보였는데, 두 기종 모두 급하강후 재상승 시험은 만족스럽게 통과했지만 스핀 회복 시험에서 그만 He 112기가 추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조종사는 낙하산 탈출로 목숨은 건졌지만 하인켈사에게는 엄청난 감점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He 112는 날개 면적이 넓어 Bf 109에 비해 롤 속도가 매우 떨어졌으며, 비행시 조작성도 Bf 109가 더 좋았다. 상승력에서 두 기종이 엇비슷한 점을 제외한다면 Bf 109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날 시험비행을 마치면서 검열관 프란케 박사는 Bf 109를 비행한 조종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지금 자네가 Bf 109를 타고 보여준 곡예비행 말인데, He 112를 타고서는 할 생각도 말게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